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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햇살에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열었던 것도 잠시, 남자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두툼한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성기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만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꼴을 더욱 엉망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그는 밤새 돌아누워 자느라 눌린 한 쪽 어깨를 부지런히 꾸물대며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 끌어안았다. 밤을 묵어 텁텁하고 익숙한 살 냄새가 났다.
" …호무라? "
음성이라기보다 거진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에츠는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채 다 뜨지 못하고 한쪽 눈만 열어 지난 밤의 해후를 간신히 떨쳐낸 채 제일 먼저 제 품 속에 파고 든 덩어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호무라는 아침에 순응하지 못하고 투정 부리는 데 여념이 없는 어린애처럼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불 속의 그런 광경은 10여 년 가까이 함께 지내왔음에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디 아픈가? 정신이 번쩍 들어 감겨 있던 한쪽 눈을 마저 뜨고 일어나 앉으려는 순간,
" 추워……. "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이불 속의 그 커다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반쯤 일으킨 몸을 도로 내리누르는 손길이 억세다. 막 깨어나 아직 꿈자락을 다 걷지 못했다지만, 그게 아픈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에츠는 안심하고 도로 자리에 누워 연인이 고집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다시 '닫으려는' 것을 보았다.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 잘 잤어? "
여상한 아침인사에 답 대신 끙끙거리는 투정만이 돌아왔다. 벽에 장식처럼 걸려 있는 시계에 흘끗 눈길을 주면 이미 오전은 훌쩍 넘긴 시각이다. 에츠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여느 때와 같았다면 그의 옆자리는 진즉에 비어 있고,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을 텐데. 그 간극이 호무라를 깨우려는 손을 잠시 붙들었다.
지난 며칠과 간밤의 일은 꿈 같기도, 아니기도 했다. 새해 선물인 것 마냥 자정과 함께 찾아왔던 그의 죽은 연인. 두 번째 삶을 사는 오랜 친구. 지난 십 년 동안 보였던 것과 다른 모습은 지금 이 순간 말고도 종종 눈에 띌 것이다. 그의 친구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재회에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은 걸까? 오래 생각하는 것은 그의 특기가 아니다. 이런 고민은 늘상 에츠보다는 호무라의 몫이었다. 이를 일깨우기라도 하듯, 이불 밖으로 불쑥 부은 얼굴이 나왔다.
" …뭐야, 깼으면 깨우지 그랬어. "
추워. 호무라는 깨어났음에도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조그맣게 웅얼거리며 에츠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까지 빼앗아 제 몸을 꽁꽁 감싸도록 둘렀다. 상념의 꼬리와 함께 이불을 낚아 채인 에츠는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호무라가 단단히 싸맨 이불을 끌러내려고 안달했다.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온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그의 연인이 이내 선심썼다는 듯 이불을 풀어내고 팔을 벌렸다.
" …잘 잤어, 에츠? 너무 춥다. 올해 겨울은 엄청 추우려나 봐, 새해 첫날부터 이런 거 보면. "
" …아니, 평소랑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데……. "
평범한 사람들은 전부 이렇게 추위를 탄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할 말을 얼른 찾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끌어안긴 에츠를 보고 호무라가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 음, 나도 알아. 날씨가 미친 게 아니라 이제 내가 덜 따뜻해졌지. "
네가 아쉬워 할 걸 안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며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호무라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잡은 에츠의 손은 훨씬 따뜻했고 제 시야는 깨끗했고 세상은 조용했다. 여름이 덜 더울 것이다. 겨울이 훨씬 추워졌으리라는 것이 몇 없는 단점이었으나 어차피 겨울 내내 끼고 살 남편이 있다. 그는 인간 난방의 힘을 믿었다. 지금도 봐라, 이불 밖으로 나가 떨어지기가 싫을 정도로 따끈따끈하다. 원래 제가 하던 역할을 서로 바꾼 것 뿐이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막 깬 티가 다 가시지도 않은 에츠는 그의 말 한 마디에 절절매고 있었다. 이럴 때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웃으면 된다. 농담이야. 잘 구운 치즈처럼 늘어진 팔이 심술궂은 농담을 한 호무라의 허리를 타박하듯 감아 안았다.
" 네가 겨울만 되면 아침마다 어떻게든 더 늦잠을 자려고 기를 쓰는 이유를 지금 알았어. "
" 뭐라고 생각하는데? "
" 너무 춥잖아. "
이불 밖으로 나오기 엄청 싫더라. 지치지도 않고 종알거리는 입은 결국 소파 위에 이불로 무장한 채 웅크리고 자리잡았다. 그간 손 닿지 않아 심하게 어질러진 살림살이를 분주하게 정리하던 에츠가 코웃음을 쳤다.
" 어제 너무 열심히 놀아서가 아니고? "
느지막이 블라인드를 걷은 베란다에서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햇빛이 쏟아졌다.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베란다 난간을 보며 호무라가 웃었다.
" 남 일인 것처럼 말하네. 같이 놀았잖아. "
둘 다 휴직 중이 아니었다면 경을 쳤을 거라고, 턱을 괴며 즐겁게 중얼거렸다. 경쾌하게 달그락거리며 식기들이 부딪치던 소리와 물소리가 멎고, 이내 에츠가 불퉁한 얼굴로 부엌에서 나왔다.
" 맞네, 같이 놀았네. 같이 놀았는데 왜 나만 집안 청소하고 있어? "
" 네가 어질러서? "
호무라는 에츠의 빤히 보이는 의도를 외면하면서 빙글빙글 웃기만 웃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실랑이에서 져 본 일이 없다. 그의 친구는 말다툼에 약했고 제게는 더더욱 약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가재도구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쌓인 먼지와 머리카락이라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라던가, 쓰레기통 대신 방바닥을 제 보금자리 삼은 생활 쓰레기들은 모두 그의 부재중에 생겨났으므로. 에츠도 그걸 아는지 짙은 눈썹 사이에 깊게 주름만 잡았다. 눈꼬리가 점점 쳐지는 모양새를 보다가 져 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에츠가 왜 그랬는지를 호무라도 알고 있었으니까.
" 결혼할 때는― 완전 좋은 남편이 될 것처럼 그러더니 혼자 하려니까 억울한 거야? "
그는 옷처럼 뒤집어 쓰고 있던 이불을 내려놓기가 아깝다는 듯 한동안 어기적거리며 발로 툭툭 바닥의 옷가지들을 소파 위로 걸어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변명처럼 덧붙이며 절절매는 연인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슬그머니 비집고 나와 제가 두르고 있던 이불을 얼른 머리부터 덮어씌워 버렸다. 아! 외마디 외침과 함께 씩씩거리는 소리가 반쯤 막힌 채로 바닥을 기는 것을 들으며 발꿈치를 들고 다용도실로 몰래 숨어들어간 것은 덤이다. 그래, 제대로 된 청소를 진작 포기했어야 했다. 신년이 오기 전이었으면 모를까, 정초에는 일 하는 법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소리를 빽빽 질러가며 옷가지를 집어던지고 청소기와 걸레로 팽팽하게 맞서 싸움하듯 집안을 뒤집고 치우는 데에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먼지를 함빡 뒤집어 쓴 옷가지를 허물 벗듯 훌훌 벗어 세탁통에 쑤셔넣고, 에츠는 욕실로 분리수거 하듯 집어넣은 호무라는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둘러맸다. 고즈넉한 공간에 물 쏟아지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전쟁의 시간이 있어야 평화로운 시간도 오는 법이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밥부터 먹는 건데. "
나무 찬합에 미리 만들어 놓고 사다 쟁여둔 오세치를 옮겨 담으며, 텅 빈 뱃속은 평화롭지 않은 호무라가 중얼거렸다. 당최 집안이 이꼴이 되어 있던 것은 음식을 마련할 때의 그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옆의 인덕션에서 닭고기와 굴을 넣은 다시가 끓으며 우러나는 특유의 고소한 향기가 진하게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하얀 도마 위에 한 차례 물줄기가 쏟아지고, 이제는 흉터가 거의 자국처럼 남았을 뿐인 커다란 손이 능숙하게 칼을 쥔다. 뿌리 채소의 껍질을 벗기는 칼 소리와 물 소리가 리듬감 있게 조리대를 두드렸다. 연근을 다 다듬을 때 즈음 등 뒤에서 뜨뜻하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쳤다.
" 떡국? "
" 음. 따뜻한 게 먹고 싶어서. "
에츠는 금세 어깨 너머로 냄비를 들여다 보던 것을 그만두고 조리대 위에 놓인 찬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당근을 썰다 말고 잽싸게 노려보자 맨손으로 몰래 집어들고 있던 밤 조림을 얼른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괜히 멋쩍고 찔려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다듬은 채소들을 국물에 넣었다.
" 뭐야, 더 담고 싶어? "
"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이 해놨던 건 몇 가지 안 되는 거 같은데 이거 다 사온거야? "
" 나 없을 때 냉장고 안 열어봤구나? "
뜨끔했는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채소가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덕션 아래의 오븐에 떡을 집어넣고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돌아섰다. 웃음기가 섞인 미묘한 표정을 보고 에츠가 머쓱함에 제 턱을 문질렀다. 서로의 마음이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한 것을. 자신의 부재에 대한 걱정을 넣어두고 갔을 테다. 알지만 제 몸 돌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으리라. 뜨뜻미지근한 시선이 한 차례 오가고 나서야 에츠는 능청스레 호무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같이 먹으려고 그랬지. "
" 말은 잘 해. "
늘, 말은 잘 했다. 둘 중 하나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면 못 알아본 척 눈꼬리를 사르르 접는 것이, 그래서 끝내는 먼저 웃은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 둘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모로미자토 호무라는 고호리카와 에츠를 이길 수 없다. 고호리카와 에츠가 모로미자토 호무라를 이길 수 없듯이. 결국 타박은 길게 이어지지 않고, 호무라는 한 해의 끝자락에 혼자 남겨졌던 연인을 더 혼내는 대신에 함께 만들었던 다테마키만 찬합에 더 쌓아 올렸다. 불편한 내색 없이 제 품에서 꾸물거리며 몸을 돌리는 호무라를 여전히 편하게 해 줄 생각이 없던 에츠의 잘난 입매가 만족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 해가 짧네. "
돌돌 싸매고 집을 나섰을 때 이미 그림자가 길었다. 이건 모두 그들이 새해의 식탁을 너무 즐겼기 때문이다. 연말에 먹지 않은 요리까지 모조리 해치울 겸해 평소보다 더 많은 양으로 배를 채우고 따뜻한 국물로 몸을 덥힌 두 사람은 한껏 게을러졌다. 무릇 배부른 인간이란 세상 만사에 보다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세 시간의 청소 끝에 그릇을 싹 치우고 반질반질하게 닦았던 싱크대에는 다시 식기가 잔뜩 쌓였다. 추운데 꼭 나가야 할까, 맞부딪치는 시선에는 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뜻이 담겼더랬다. 숨이 후텁지근해지도록 난방을 틀고 소파에 파묻혀 간밤에 놓친 홍백전 재방 프로그램도 보고 귤도 까먹느라 분주하게 남은 오후를 다 보냈더니, 지난 며칠간은 아무리 해도 느리게만 떨어지던 해가 순식간에 간당간당하다. 노랗게 익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에츠가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를 더 축 늘어뜨렸다.
" 지금 시간에 참배 가 봐야 신이 콧방귀나 뀌는 거 아닐까 몰라. "
" 음, 신이 좋아할 만한 연초의 모습은 아니지. "
신년 참배야 거진 일주일 내리 이어진다지만 호무라가 기억하는 신의 아량이란 좁고도 좁았다. 그들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갈라져 나오게 된 지금도, 그는 큰 기대가 없었다. 물론 이제는 큰 걱정도 없다… 그의 곁에서 걷는 연인은 지극히 소박하고도 대단해서 무려 십 년을 제가 딴 세상에 한 발 걸친 인간인 줄을 잊게 해 주었으므로.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소소한 재미다. 덤으로 얻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고민의 부산물들… 그는 깨어난 점심 나절부터 내리 부린 엄살 탓에 에츠가 꽉 동여매어 준 목도리를 느슨하게 당겨 내리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 그래도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싶으니까. 평범하게 재미로 소원도 빌고 운수제비도 뽑고. "
이 말에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의 연인은 이런 말까지 들어놓고도 집에 돌아가자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보통인 듯 아닌 삶을 살면서 꿈꿔왔던 평범함을, 얼마든지 누리게 해주고 싶어할 것이다. 감히 모든 것이 추측이지만 그는 자신의 친구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함에 있어 빗나가 본 적이 별로 없다. 제 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끌어다가 넣은 손을 꽉 잡아오는 것이 귀엽기도 하지. 비죽비죽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못 들은 척 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라. 이러니 몇 번이고 보았음에도 또 그를 같은 방법으로 놀리고 싶어지는 걸테다.
" 그리고 따지고 보면 태어나서 처음 가는 신년 인사잖아. 좀 더 즐겁게 동행해 달라고. "
" 너는 꼭 말을 해도……. "
"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애 행세를 해 보겠어? "
뜨악한 얼굴도 잠시 뿐이다. 처음을 함께한다던가, 특별하다던가, 형으로 대접하는 듯한 누가 보면 참 어설픈 어리광이 에츠에게는 잘도 먹혀 들어간다. 그리하여 돌계단을 거진 다 오를 즈음 해서는 집에서 나설 때의 귀찮은 내색을 싹 털어낸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추위에 에여 코끝과 뺨과 귀가 모두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새빨간 곰인형 같았다. 과연 추위 뿐일까, 호무라는 마침내 싱글벙글 웃었다. 산 언저리에, 발 아래 펼쳐진 풍경에, 그들의 머리 위에, 저 조금 높은 턱 위에 있는 토리이에 세상 붉은빛이 만개한 꽃마냥 흐드러졌다. 들이쉬는 숨결도,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풍경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십 년이면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가까울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츠는 오늘의 모든 시간이 새로웠다. 더는 몸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뜨겁지 않은, 이제 겨울 거리에 나서려면 자신보다 더 두텁게 껴입어야 하는, 손의 흉터가 흔적처럼 희미한, 함께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연인이 새삼스러웠다. 지금도 그랬다. 미신이라면 무엇 하나 기꺼워하는 게 없었던 호무라는 처음으로 그와 함께 한 해의 운을 기원하러 왔다. 물론, 에츠가 그의 달라진 시야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변화는 잠깐의 상실이 그에게 안겨준 불안을 쉽게도 날렸다.
오색 실로 엮어 내린 끈을 쥐고 종을 흔든다. 카랑카랑한 타종음이 인적이 뜸해 고요한 경내를 울렸다. 에츠보다 훨씬 더 그런 일이 익숙할 그의 연인은 종 치는 것 하나까지 다 신기한 듯 입가에 머금은 웃음을 덜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실제로 보낸 세월보다 어려 보이는 삶을 살았다. 마르고 긴 손마디가 능숙하게 소매를 잡아 끌었다. 굳이 혼자 사는 복을 기도하러 올 이유가 없었으므로, 에츠는 다소 낯선 기분으로 호무라와 함께 새전을 떨어뜨렸다.
" 돈 받았으니 이젠 제대로 일 해주면 좋겠네~. "
" 동전 하나로? "
" 내가 여지껏 무급노동 한 게 얼마인데. "
이제 돌려받을 때도 되었다며, 불경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과는 다르게 다소곳한 자세로 절을 하는 호무라를 보고 가는 웃음을 흘렸다. 아마 몇 번을 고쳐 죽고 다시 태어나도 저 성미만은 변함이 없을 테다…. 에츠는 제 사랑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알아볼 수 있겠다는, 당최 근거가 터무니없는 안도감과 즐거움을 품고 그를 따라 본전 앞에 예를 취했다. 손을 모으고 올리는 첫 기도는, 두 사람의 기도는 같을지. 제 소원보다도 우리의 소원이 같기를, 그것을 먼저 빌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스라이 먼 일로만 느껴지는 지난 날을 상기했다. 죽기 위해 살았던 날이, 살고 싶어서 죽으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를 위해 죽고 내 곁에서 살아주기를. 반복되는 일상에 안온하고 지루해지다가도 불쑥 치고 올라오는 두려움의 연원. 이번의 헤어짐이 끝이었으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인다. 필사적이라 불러도 좋을 소원을 담아서.
눈을 뜨고 다시 한 번 예를 마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온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길어진 그림자 둘이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경내를 거닐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볼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그날 뽑은 운세 제비를 나무에 묶지 않고 가져갔다.
해는 져도 도시의 거리에는 어둠이 깔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돌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이미 노점을 밝힌 등불의 개수를 헤아렸다. 지난한 세월을 떠나보내고 새로 올 날의 기대를 머금은 불빛들. 길목 양옆에 늘어선 노점 사이사이에서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더불어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냄새도. 아마자케 한 잔으로 덥힌 속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에츠와 호무라는 시선을 교환했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도통 나이 먹을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의 신조와도 같았다. 좋은 하루의 마무리는 기도도 대길 제비도 아니다. 속을 든든하고 따뜻하게 채우는 것이다. 둘은 시시덕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저물어가는 새해 초야, 그 어느 때보다도 날아갈 듯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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